사람들이 우주를 바라보는 방식은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많은 관계가 있다. 그리고 하늘은 예로부터 무엇이 지금 이대로의 세상을 만드는 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도시화된 세상에서 인공조명을 사용하는 오늘날에는 우리 선조들에게 그토록 중요했던 그 하늘을 감상하기는 힘들다. 쉽게 사용할수있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볼 필요가 없어졌다.
최초의 인간들의 지식과 하늘
밤에 도시의 불빛 때문에 머리위에 어떤것이 있는지는 거의 보이지않는다. 껌껌한 칠흑 같은 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별빛은 점점이 흩어져있는 불빛보다 더 희미하다. 도시 주민들에게는 밤하늘이 그저 플라네타륨 아래에 보존되어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런 요소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잘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써 왔고, 덕 분에 그런 저력 하늘을 보이지 않게 가려 놓았다. 그 과정에서 문명의 토대가 되는 요소들로부터 스스로 배제되기도 했다. 석기시대를 생각하면 우리 인류역사는 하늘을 도구로 사용했었다고 한다.
최초의 인간들은 손으로는 부싯돌을 움켜쥐고 머리로 하늘을 터득했다. 천체의 규칙적인 운행은 시간을 알려주고 자신들의 위치를 알게 해 주었다. 그들의 문명은 한편으로는 손으로 도끼와 화살 촉, 작살 같은 도구를 만들어 쓰고, 또 한편으로는 하늘에 대해 알게 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하늘로부터 시간, 질서와 대칭, 그리고 자연의 예측 가능성이라는 심오한 의미를 얻었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 인 우리는 그것을 물려받았다. 이렇게 하늘을 알아 차림으로써 과학의 토대뿐만 아니라 우주와 그 안에 있는 우리의 자리를 바라보는 시각이 마련되었다. 하늘은 사람들을 살아남게 해주는 매우 실용적인 도구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이라는 개념에 아주 익숙해져 있어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시간 때문에 입박을 받기도 하지만, 시간은 벽에 걸려있는 달력만큼이나 정직한 젓 같다. 거기 우리 앞에 앞으로 다가올 날들과 지금 막 지나간 날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정신적으로 우리는 자신이 수많은 날들의 질서 정연한 연속 선상 어딘가에 있다 고 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를 평가하고 미래를 계획한다. 시간에 대해 이런 의식을 갖고 있으므로 복잡한 사업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조직화되고 협력적인 집단은 진화에서 우위를 차지하며, 사회 웅집력의 본질 인 효율적인 인 상호 작용은 기준이 될 공통의 시스템을 마련하라고 요구한다.
시간 관리와 달력은 그 의미를 이해하고 측정하기 위해 믿을 수 있고 반복적인 천체 주기에 의존한다. 위치를 파악하는, 다시 말해 풍경을 조직적으로 정리하는 우리의 위치 감각 또한 우리가 살아남도록 해주 었으며, 그 역시 하늘에 의존한다. 지상의 방위는 천문 현상에서 그 의미를 얻는다. 변함없는 북극성과 지평선을 따라 태양이 떠 오르는 지점의 규칙적인 변화에서 방위의 의미가 생긴다는 말이다. 이 점에서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전혀 다르다.
카를폰 프리쉬의 업적
오스트리아의 노벨상 수상자 인 카를폰 프리쉬의 업적에서 알 수 있듯이, 꿀벌은 태양의 위치와 자외선을 이용해 벌통에서 꽃으로, 꽃에서 벌통으로 가는 길을 찾아낸다. 비둘기들은 태양과 몸속 시계를 이용해 자기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다. 우리의 서식지는 땅에 국한되어 있고 눈높이는 개미 정도이므로, 머리 위로 솟아있는 나무들의 패턴이 뭔가를 기준으로 삼고 자하는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을 것이다.
그건 마치 장애물들로 뒤덮인 미로를 통과하면서 가까스로 자기 굴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내며 먹이를 찾아 헤매는 개미들처럼 보인다. 우리는 지상을 떠돌지만, 그러나 우리 두뇌를 사로잡는 것은 바로 하늘이다. 우리 조상에게, 하늘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은유였다. 그것은 뭔가를 이 미 했다. 그것은 자기들의 삶을 규정한다고 느끼는 원칙을 상징하는 것이 기는 했고, 또 그 원칙 뒤에 있는 힘이기도 했다.
하늘에는 특별한 힘이 있었다 단위 모양에 따라 조류가 달라지고, 태양과 별들이 협력해서 계절을 나누며, 세상 기 그 세상에 거주하는 존재들은 계절의 변화를 따른다. 도시화된 현대인들은 하 늘에서 일어나는 일과 자신의 삶 사이의 이런 긴밀한 결속감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몇몇 전통적인 사람들은 지금도 그것을 간직하고 있다. 콜롬비아의 데사나 원주민들은 하늘을 '두뇌'라고까지 하며, 두 개의 반구는 은하수로 나 뉘어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들의 두뇌는 하늘의 공명과 함께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런 생각이 그들을 세상과 융화시켰고, 이 우주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인 식 하게 해 주었다. 데사나 원주민들의 이러한 인식을 고대인들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고대인들은 하늘이 인간의 영혼과 사회를 규정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들 이하는 일에서 하늘과 두뇌의 결속을 표현했다. 달력과 시계에서, 별자리 표와 책력에서, 신들과 신화에서, 의례와 의상과 춤에서, 그리고 신전과 무덤에서 이 결속의 표현은 천장 에다 상징화하기도 했고, 바닥에 다하기도 했다.
그들은 도시 설계 속에 그것을 깊숙이 박아 넣기도 하고, 게임 보드 위에 짜 넣기도 했다. 왕실에서 충성스러운 신하에게 토지를 수여한 것을 기념하는 경계석에 그것을 새겨 넣었고, 왕의 공식 문서와 사회 조직 속에 짜 낳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세상이 어떤 상태인지 보려고 하늘을 이용했고, 또 어떤 이들은 미래를 점치려고이 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주 안에서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는 우주를 알아야만 알 수 있다.
우주의 구조, 우주의 창조, 그리고 우주의 궁극적인 운명은 머리 위에 있는 단서를 보고 추론해야 한다. 진짜 천문대에서 하늘을 보았던 고대의 천문학자들은 밤을 새워 가며 그 의미를 찾았다. 오늘날 현대 천문학 자들도 같은 탐색을 계속 하 고있다. 이 오래된 하늘 관측 전통은 지금도 우리에 게이 우주 안에서 우리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 어느 시대에 있는지를 말해 준다. 우리는 하늘의 질서를 깨닫고 그것을 땅에 수놓는다. 하지만 이런 것을 깨달았다 고해서 놀랄 필요. 는 없다. 하늘도 결국은 우리 마음의 눈을 비추는 거울 일 뿐이니까.
조상들의 눈으로 볼 때
조상들의 눈으로 볼 때 우리들 대부분은 하늘과의 교감을 상실했지만, 마음속에는 그 오래된 유산을 간 직하고 있다. 저녁놀의 빛깔에 사로 잡히면 우리는 멈춰 서서, 머나먼 지평선의 어두운 실루엣 뒤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태양의 마지막 광채를 지켜본다. 지금은 새들의 아침 노래 대신 알람 시계 소리에 깨어나지 만, 조상들이 새벽에 깨달았 던 만물이 소생하는 느낌을 여전히 경험할 수 있다. 해뜨기 전에 일어나서 첫 번째 따뜻한 햇살이 풍경 위로 퍼지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교외로 나가 보면 적어도 수만 년 동안 사람들이 지켜봤던 것과 똑같은 별들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조상들이 했던 것처럼 하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직업이나 생활 방식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지만, 잠깐 하늘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느꼈던 것을 느낄 수 있다. 수많은 별들이 하늘에 흩어져 뿌려져 있다. 그것들 중에는 유난히 밝게 빛나며 주의를 끄는 것들이 있는데, 한층 더 밝은 행성들은 자기 주위에 있는 다른 많은 별들로부터 떨어져 홀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길게 늘어진 은하의 희미한 꼬리는 마치 거대한 무지개의 하얀 유령처럼 하늘에 다리를 놓아주고 있다. 밤하늘은 풍요롭고 아름답고 신비 롭다. 하지만 하늘을 체대로 알려면 계속 지켜봐야 한다.
그것은 눈길을 한 번만 다른곳으로 돌려도 변해있다. 매시간, 하루하루, 한달, 1년, 그리고 끔찍할 정도로 기 나긴 시간의 주기 속에서, 하늘을 계속 주시하는 게 힘들다는것을 조상들은 알아챘다. 단순한 한 주기로, 즉 지구의 자전으로 시간이 측정되고 방위가 정해진다. 주기는 아침에 태양이 떠오를 때 시작된다. 이 때문에 태양이 지평선을 가로지른다 고 말하는데, 지평선은 주위에 펼쳐져있는 땅과 그 위로 뻗어있는 하늘처럼 좀 짧은 주기는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지평선의 원래 의미는 경계선 '또는 한계'다. 우리가 있는 즉 경제가 있는 공간이라는 의식을 갖게 된 건 땅이 하늘의 '가장자리'에서 끝난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지구가 동그랗거나 평평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는건 중요하지 않다. 어떤 곳에서든 지평선이라는 테두리로 에워 싸여 있으니까. 결국, 태양은 지평선으로 복귀한다. 태양이 일단 사라지고 나면 하늘은 점 점 어두워지고, 한 시간 안에 별들이 지켜보면, 대부분의 별들이 태양과 똑같이 운행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것들은 지평선 위로 떠올라 세상을 가로질러가서는 지평선 아래로 진다. 해가지는 곳 가까이에 있는 별들은 태양을 따라 초저녁에 지평선 아래로 들어간다.
태양이 질때 떠오르는 별들은 밤새도록 하늘에 떠있다. 하늘에 아직 남아 있던 새벽 별들도 태양이 낮을 가지고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새벽 어스름 속에 어느 덧 사라지기마련이다. 이 신뢰할 수 있는 낮과 밤의 패턴이 시간의 경과에서 나타나는 하늘의 첫 번째 주기다. 낮과 밤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태양과 벌들의 여정에 의해 나뉜다. 그것은 자전하는 지구가 생명을 불어넣어 준 퍼레이드다. 하지만 사람들은 땅위에서있어도 움직임을 느낄수없다. 그래서 움직임보다는 하늘에 반사된것을 보는것이다. 우리 행성은 서에서 동으로 회전하는데, 그게 마치 화려한 축제 행렬이 동에서 서로 굴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동쪽과 서쪽의 방위 의미
동쪽은 시작하는 의미이고 서쪽은 지는것을 뜻하는경우가 많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기 때문이다. 이런 방위에는 의미가 있다.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천문 현상들이있다. 이런 현상들은 그 나름의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정동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로 동쪽이라고 말할 때면 천체들이 나타나는 지평선 반쪽을 언급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들은 거기서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탄생, 창조, 그리 고 동쪽과 함께하는 삶을 연상한다.
이것을 라틴어로 해석하면 동쪽은 오리엔트이며 동사 떠오르다'에서 파생된 단어이고, 서쪽은 옥시덴트이며 동사 '지다'에서 파생된 단어 다. 고대인들은 태양과 다른 천체들이지는 것은 곧 그것들의 '죽음'이라고 생각했으며, 지금도 '만년'이라는 말은 노령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많은 문화권에서 서쪽은 죽음의 땅이다. 그래서 제1 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 한 병사들은 '서쪽으로 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반지의 제왕」을 읽고 영화도 많이 봤을것이다.
그 소설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 프로도와 빌보는 늙고 또 한 시대가 끝나자. 자기들의 고향을 떠나 '서쪽 세계' 로 간다. 어떤 별들은 절대 지평선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 위치에 있다. 그 별들은 밤이든 낮이든 공통의 충심, 즉 절대 움직이지 않는 한 점을 증심으로 도는 순환 궤도를 따라간다. 우리 시대의 북반구에선, 작은 곰 자리에서 거의 움직임 없는 별 하나가 그 점을 차지하고 있다. 바로 북극성이다.
그 이름은 하늘의 북극 절대 지지 않는 별들이 뒤 따르는 순환 궤도의 중심을 나타낸다. 지구가 자기의 극 주위를 자전하는 것과 같이, 태양은 이 단 하나의 점 주위를 회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주위를 완벽하게 도는 별들을 주극성 이라 한다. 하늘의 북극을 정면으로 보면, 별들은 그 주위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도기만 지구의 적도 아래 남반구에서는 그와 비슷한 점, 즉 하늘의 남극 주위를 고 리 모양으로 그리고 시계 방향으로 움직이는 게 보인다.
그것을 가리키는 발을 물체는 없지만, 별들의 매일의 움직임 때문에 그것에 주목하게 된다. 극 에이라는 말은 '말뚝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단어 뒤에 있는 개념은 하늘 덮개 에까지 닿는 막대, 하늘을 떠받치는 막대, 하늘을 하루에 한 번씩 회전하게 하는 축 역할을 하는 막대 다. 그것은 우주의 축이며 다양한 사람들의 신화에서 산으로, 진짜 막대로, 나무로, 하늘을 꿰뚫는 지팡이로 묘사된 다.
어떤 사건에서든 하늘의 극은 특별한 장소이며, 움직일는 하늘에서 움직이 지 않는 기준이다. 북극성이라는 꺼지지 않는 횃불로부터 상상의 선을 하나 그으면서 지평선으로 곧장 내려오면, 우리가 있는 방향은 북쪽이다. 북반구에서는 북극성이 우 리에 게이 방향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북극성은 또 북쪽 하늘의 별이라고도 한다. 일단 북쪽을 찾아내면 다른 3 개의 기본 방위, 즉 남, 동, 서는 자동 적으로 밝혀진다. 나침반의 기본 방위 사이에는 4 개의 중간 방위인 북동, 북서, 남동, 남서가 있고, 지평선의 각 4/1 원호의 중심에 있다.
댓글